Critique concernant les tableaux de M. Kwak Ho Jin

Nouméa, le 13 avril 2010

Notre perception européenne, habituée à un certain pragmatisme, pour ne pas dire conformisme didactique, est bien souvent déstabilisée devant l’expression artistique venant d’Asie. Nous l’apprécions, mais disons-le, nous ne la connaissons pas et sommes bien loin d’en apprécier toutes les nuances, toutes les tonalités vibratoires qui la composent. Et pourtant….

Et pourtant, l’œil du profane que je suis aime à se promener sur les tableaux de M. Kwak Ho Jin, à parcourir cette simple et minutieuse complexité, toute cette infinie et scrupuleuse patience que l’on sent attachées à chaque détail. Tout y est recherche, le moindre geste novateur est choisi, calculé, ressenti, l’infime partie composant l’ensemble est source de grandeur car rien ne peut échapper au « tout », et, sans lui, le « tout » perd sa consistance d’absolu. Couleurs, formes, images sont à leur place et vibrent à l’unisson pour harmoniser création contemporaine et symbolisme millénaire coréen.

On sent bien la volonté de M. Kwak Ho Jin d’aller de l’avant, mais l’on voit aussi son désir profond de conserver ses racines, sincères et pénétrantes, qui forment son passé culturel. Il veut les définir respectueusement tout en se projetant résolument vers l’avenir. Quelle plus belle représentation qu’un monde de rêves, autre source de symboles, pour y parvenir !

Comment ne pas reconnaître le Yin dans ce bleu matriciel de l’eau, comment ne pas voir cette terre ancestrale où tout peut pousser et qui conserve en son sein la matière nutritive. Comment ne pas reconnaître le Yang, l’élément actif, le rouge du feu, de la flamme qui réchauffe et engendre la vie. Ces deux couleurs sont la nature existentielle de l’œuvre : le bleu pour la base, le rouge pour le centre….et une troisième couleur, le jaune enfin, pour la naissance et l’avenir. Et le tout baigne dans une atmosphère vaporeuse, presque éthérée, les couleurs allant s’estompant, par vagues définies, tout en s’éloignant du centre. Les tons se refroidissent alors, ils s’étiolent, ils s’ionisent comme si ils étaient happés par le néant. Ils tendent vers un autre monde, c’est un paradigme qui s’offre à nous ; matériel, immatériel ! Où doit se fixer la conscience ?

Mais revenons à la force vivante, au point central du tableau qui l’humanise et lui fait prendre toute sa forme d’unité. Les coupes d’abord, créations du génie humain qui, sous ce plan onirique, ne peuvent devenir que reconnaissance d’un lent apprentissage séculier, mais aussi les bases d’un savoir reconnu ; les fruits, bulbes et fleurs ensuite qui, beautés réelles de la nature, sont le lent processus d’une longue et constante évolution.

Ces fruits ne sont-ils pas la résultante d’une interaction entre le Yin et le Yang, entre la thèse et l’antithèse, le résultat d’un accord parfait, en un mot la synthèse de l’évolution, chose évidente quand on arrête un moment son regard sur le tableau intitulé « l’Immortalité ». Tout y est présent ; les trois couleurs qui composent le Sam Tae Geug s’inscrivent côte à côte dans un mouvement dextrogyre qui invoque la plénitude, l’harmonie de chaque tonalité, le « la »  qui précise la pénultième étape avant le devenir.

M. Kwak Ho Jin nous interpelle et nous susurre délicatement que tout est dit, que tout est stable, que le monde du compromis n’est pas loin, qu’il existe bien….qu’il se profile enfin, car les racines sont fermes et assurées.

Alain Brianchon

곽호진 개인전 서문
2010년 4월 13일 뉴칼레도니아
우리 유럽인의 인식은 특정 실용주의에 익숙한 아니 순응하는 교육으로 살아 왔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예술적 표현은 유럽인이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의미와 화면의 파장이 있다. 이러한 진동, 음색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가는 전시....

나는 곽호진의 작품을 좋아한다. 단순 한듯하나 미묘한 질감, 세밀함과 복합적인 표현들은 작가의 무한한 인내심을 볼 수 있다. 화면의 세밀한 복합성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그러한 연관들은 새로운 움직임으로 살아난다. 화면은 절대적인 색상과 형태가 존재하며 그러한 색과 형태 존재의 이미지는 한국이 가진 천년 역사의 고대 상징성에서 출발해 현대적 이미지와 가치를 표현해 낸다.

곽호진의 작업에 나타난 기호, 아름다운 꿈의 기억성, 더 나은 세계로의 표현, 이러한 이미지의 발상은 작품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으며 관객들에게 정중하게 정의되길 바란다. 또한 우리에게도 자신의 깊은 욕망과 과거의 문화를 구성하는 뿌리, 정통성 등이 바탕이 되어 새롭게 인식된다.

푸른 물결은 모체의 음을 의미하고 모든 것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자체 내의 영양분을 공급하지만 과거의 흔적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불의 활성요소는 양의 의미를 나타내며, 따스한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 이러한 두색상은 곽호진의 작품에 실존적으로 존재 한다. 그리고 제3의 색인 노랑색이 존재하고 이러한 구성은 출생에서 성장 그리고 죽음까지,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의 또 다른 이원화된 표현으로 존재한다. 곽호진의 작품은 이러하듯 또 다른 세계로 열려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우리는 어떻게 인지 해야 할까?

곽호진의 작업은 살아 있는 힘과 인간성의 조화와 상처, 천재의 창조물과 같은 세속적인 인식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지식의 결과인 과일, 꽃 등의 형상들이 자연의 느린 그리고 지속적인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상들은 음과 양 의 사이에 완벽한 조화로 표현되고, 그러한 조화의 결과는 곽호진 작가의 작품 화면에서 “불멸의 삶”으로 존재 한다. 모든 시각은 현재를 중심으로 순환하며 또한 공존한다. 형상과 고유의 색들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에 곽호진 작가의 고유한 하모니로 다가 온다.

곽호진의 작업은 우리에게 부드럽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타협 속에 존재한다고 속삭인다. 작가의 시각적 메시지가 그 원형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늘 그 존재의 시작과 확고한 세계를 알려줄 것이다.

평론가 알랭 브리앙숑
초현실과 현실이 만나는 ‘인공자연’, 그 환상적 풍경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곽호진의 이번 전시 타이틀은 ‘전이’를 의미하는 “Transfer”다. 이 단어는 또한 ‘전환’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차를 갈아탈 때, 혹은 자리를 옮길 때도 이 단어를 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유독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 상징들이나 일상적 사물의 이미지들이 작가의 눈을 통해 뇌 속에 입력되고 거기서 일련의 창조 과정을 거쳐 작품의 이름으로 출력될 때 관객과 만나는 일종의 소통의 메커니즘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물과 만난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눈길을 끄는 특정의 사물과 그 이미지에 주목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때로 아주 낯설게 다가온다. 작가란 낯익은 사물이나 이미지들에서 낯선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발언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인데, 이를테면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에서 로깡땡의 시선을 통해 발언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하다. 곽호진이 익숙한 일상에서 탈피하고 싶어 낯선 상상을 한다고 했을 때, 대략 이러한 시선이 아닐까. 낯선 상상이란 곧 일상의 익숙한 모습을 통해 그것을 ‘벗어난(beyond)’ 어떤 국면을 상정하는 일일진대, 가령 초현실적 풍경이 바로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는 “시각적 언어로 나의 상상이 있는 초현실적인 세계와 관객들이 존재하는 현실적인 세계를 연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풍경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같은 일상적 풍경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그것은 작가의 의식을 거쳐 ‘전이된(transfer)’것 과는 판이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 매개를 작가적 의식의 개입 혹은 작가적 상상력의 개입이라고 하자. 그러면 후자는 작가에 의해 ‘덧 씌워진(framing) 것’이 될 것이다. 관객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다시 말해서 전이된 곳, 평범한 일상적 소재가 작가의 눈을 통해 일련의 창조 과정을 거쳐 작품의 이름으로 출력된 곳이 바로 관객이 만나는 지점인 것이다.

곽호진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란 이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어떤 풍경이다. 그것은 가령, 벗은 인체를 찍은 사진 위에 기존의 작품 사진을 오버랩하여 전혀 다른 인상의 풍경을 빚어내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는 컴퓨터 합성기법을 이용하여 이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사진의 몽타쥬 기법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일상의 풍경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환(transfer)’하는 작업이다. 관객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벗은 인체를 만나는 지점이 일상적 지점이라면, 작가의 상상력과 의식적 개입을 거친 후의 풍경은 일상적 지점을 ‘넘어선(beyond)’ 초현실적 지평인 것이다.

곽호진의 사진 작품과 이번에 보여주는 대규모 설치작업은 이처럼 변형된 일상적 풍경이다. 전시장 하나를 가득 채우게 될 설치작업은 환경 자체를 아주 낯선 모습으로 바꿔놓고 있다. 천장에 매달린 사람들의 모습, 그는 아주 얇은 MDF 보드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의 발밑에 원반을 놓아 인공의 자연을 형성해 놓았다. 블랙 라이트의 빛을 받아 그가 형성한 인공자연은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낙원과도 같은 설치환경은 그 자체가 낯선 풍경이다. 천장에 매달린 사람들은 환풍기의 바람으로 인해 천천히 움직이고, 발치에 놓인 원반 위에는 갖가지의 작은 동물들과 나뭇가지들이 어울려 소국(小國)을 이루고 있다. 형형색색의 모습을 띤 사람들은 시각적 잔치를 보여준다. 천장에는 별을 의미하는 입방체들이 여러 개 매달려 있다.

이 환상의 세계는 곽호진이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관객과의 소통을 기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소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는 “나의 상상이 있는 초현실적 세계와 관객들이 존재하는 현실적 세계”를 연결시키길 원한다고 말한다. 이를 다시 해석하자면, 그가 이룩한 인공자연은 초현실적 지평의 세계다. 반면에 관객이 발을 딛고 있는 전시장은 현실적 세계다. 그런데 바로 이 둘을 매개하는 공간이 바로 작품이 놓인 전시장인 바, 그곳은 작가적 상상에 의한 초현실적 세계와 관객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중첩된 곳이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공간이 지닌 이 이중적 의미야말로 예술이 서식하는 공간이자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뛰어난 해석이 아니겠는가. 여러 상징과 기호, 의미가 난무하는 공간에서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야말로 예술작품을 매개로 한 의견의 교환과 소통이 일종의 거래처럼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 예술이란 다름 아닌 거래요, 교환이 아니던가.

곽호진의 이번 개인전에는 그가 지금까지 실험해 온 다양한 기법과 방법론이 활용되고 있다. 약 15년에 걸쳐 그는 드로잉, 평면, 입체, 설치에 몰두해 왔는데, 특히 추상화는 그가 주력해 온 분야다. 그는 3년간에 걸친 유학생활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민화에 대한 관심은 그런 영향 탓이 아닌가 짐작한다. 비단 민화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 과일과 꽃들에 대한 관심, 선화나 문인화풍으로 묘사한 인물화 등등 소재뿐만이 아니라 재료, 혹은 그러한 작품들을 담아낼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시도들 또한 곽호진의 작업에 있어서 하나의 과도기적 징후에 불과하다. 그의 작업은 늘 현재진행형인 관계로 뒷날을 예측할 수 없고, 그의 상상력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것이 시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설치작업을 위해 한 차례 예행연습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작업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매우 성실함을 증명해 주는 척도가 아닐 수 없다.